김단고의 생존일지
17년 차 외식업 마케터가 퇴사하고 배달하면서 보이는 것들
2025.12.07

저는 제가 잘난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다가, 30대까지 모아 온 모든 것을 잃고 마이너스로 40대를 시작한 배달부입니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배달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집에 오면 저에게 맛있는 밥을 차려 먹이고, 밤에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리려고 유튜브를 준비합니다. 이 삶이 어째서인지 그렇게나 행복합니다.
배달은 제게 돈 이상의 것을 줬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시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시간, 그리고 내 시간을 내가 정하는 결정권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떻게 삶을 바꿔 놓았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망한 직후에는 ‘이게 현실일 리 없어’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체불 급여와 퇴직금까지 정산하고 나니 말로만 듣던 억대 빚더미가 남았고, 10년 동안 모은 투자금까지 날렸으니 실제로는 몇억대를 잃은 셈이었습니다.
몇 주 동안은 우울하거나 슬프다는 감정조차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얀 공기처럼 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정말 안 좋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그렇게 혼자 가 버리는 건 빚이며 보험금이며 모든 뒷정리를 남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배달이라도 해서 최소한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수습하자. 그렇게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잘못된 태도였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작한 배달이 막상 해 보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배달은 완전 밀착형 시장 조사였습니다
외식업계에서 10년 가까이 브랜드 마케팅을 하다 보니 서당개처럼 몸에 밴 직업병이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배달을 하니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홍보물과 메뉴 사진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음식을 픽업하러 가게에 들어가면 홍보물, 메뉴 사진, 주방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음식 사진은 어떻게 찍었는지, 카피는 어떻게 썼는지 살펴봅니다. 어떤 곳은 AI로 사진을 뽑았고, 어떤 곳은 비싼 스튜디오에서 찍어 왔고, 어떤 곳은 합성 티가 너무 납니다.
주방을 보면 매출이 보입니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건 주방 구경입니다. 식당을 만들 때는 메뉴와 업종에 따라 주방을 몇 평으로, 어떤 구조로 낼지, 어떤 설비를 들일지 정합니다. 그래서 설비를 보면 그 식당이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늠이 됩니다.
옆에 쌓인 부자재나 식재료 상자,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 수를 보면서 매출을 거꾸로 계산해 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원가 얼마에 배달비와 인건비를 빼고 어느 정도 남겠구나’ 하고 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게 정말 재미있습니다.
결국 그 식당이 브랜드를 어떻게 대하고 드러내려 하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완전 밀착형 시장 조사인 셈이고, 기획하는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날을 세워 줍니다.
쓸모없는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
외식업계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배달로 돈을 더 버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신 그동안의 경험 덕분에 새로운 일을 하면서도 더 많은 것을 눈에 담고, 더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이든 다양한 경험이 쌓이고 연결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세계를 받치는 기둥이 됩니다.
내향인에게 배달은 마음의 시간을 줍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저 같은 극도의 내향형 인간에게 특히 큰 것, 바로 마음의 시간입니다.
직급과 관계, 역할에서 오는 감정 노동에서 벗어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오토바이에 앉아 있는 동안 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유튜브 원고를 썼다 지웠다 하고, GPT와 음성 모드로 대화하면서 저를 생산자로 바꿔 나가는 과정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돈을 버는 동안에도 내 일의 로드맵을 기획할 시간이 있다는 건, 회사에서 중간 관리자로 일할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자유가 용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행복한 건 지금 당장의 결정권이 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집에 숨을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필요한 시간을 마음대로 쪼갤 수 있습니다. 제가 책임질 수 있는 한에서는 지금 당장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평일 밤에 무작정 동해 바다를 보러 떠날 자유가 제게 있습니다. 물론 당장 돈을 벌어야 하니 실제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원하면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심리적 피난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 덕분에 내 삶의 생산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걸어갈 용기가 납니다.
40대는 나라는 브랜드를 갖춰 갈 시기입니다
불혹이라는 말 그대로, 40대에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과 비전을 정해 인생의 일관된 메시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진짜 행복할 수 있는 일, 도울 수 있는 사람, 만들어 낼 가치를 찾으려 합니다.
가게의 퍼널과 유튜브의 퍼널은 똑같습니다
배달하며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마케팅의 큰 원칙은 결국 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퍼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고, 이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똑같습니다.
음식점도 상당 부분이 숫자입니다.
- 내 가게 앞을 하루에 몇 명이 지나가는지
- 그중 몇 명이 우리 가게로 들어오는지
- 들어온 손님이 가게와 메뉴를 둘러보고 자리에 앉는지
- 어떤 메뉴를 주문하고, 한 테이블당 평균 얼마를 쓰는지
- 어떤 유형의 손님이 자주 다시 오는지
이런 것들이 깔때기처럼 그려집니다. 그래서 유동 인구에 따라 상권이 생기고 임대료가 달라집니다.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권에서 간판을 노출하듯 관심사를 기반으로 썸네일이 노출됩니다. 손님이 무엇을 파는지 둘러보며 음식 사진과 이름을 보듯, 시청자는 제목과 썸네일을 눌러 영상을 살짝 봅니다. 그러다 괜찮겠다 싶으면 자리를 잡고 마음에 드는 음식을 주문하듯 영상을 끝까지 봅니다.
유튜브는 아직 초보지만, 퍼널의 본질이 같다는 걸 새기고 나니 조금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다시 찾고 싶은 가게처럼 콘텐츠를 차리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수많은 온라인 상권 속에서 제 간판을 눌러 들어와 주시는 분들이 참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또 오실 수 있게 좋은 것을 차려 드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혹시 지금 하는 일이 예전 경력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인다면, 그 일 안에서 내 경험으로만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유튜브 〈김단고의 생존일지〉 3화를 글로 옮긴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영상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