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고의 생존일지
망한 살림에서 나온 비싼 물건들, 버리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치를 드러내는 법
2026.06.21

이삿짐을 정리하다 구석에 숨겨 두었던 비싼 술 몇 병과 비싼 신발을 다시 꺼냈습니다. 지금 제 처지에는 안 맞는 물건들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버리시겠어요, 갖고 계시겠어요?
저는 이 물건들을 두고 1년 가까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사를 계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건으로는 내 가치를 대신 드러낼 수 없다는 것, 내가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내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고, 이것들만 남았습니다
몇 년 전 회사를 폐업할 때, 급한 빚부터 막으려고 시계, 차, 카메라처럼 팔 수 있는 건 전부 팔았습니다. 그런데 술은 술이고, 신발은 제가 신던 것이다 보니 팔기도 어려워서 그냥 갖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물건을 갖고 있는 게 그리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 정도면 이런 거 사도 돼’라는 생각도 있었고, 이런 물건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나 상태를 대신 드러내 주는 도구라고 여겼습니다. 재테크 수단이 아니었으니 마시고, 신었습니다. 그때는 그럴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망하고 나니 같은 물건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망하고 나니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쫄딱 망한 사람이 백만 원짜리 신발을 신고 배달하는 게,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스스로 편치 않았습니다. 망한 티를 안 내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고, 내 처지에 안 맞는 물건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볼 때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하고 망하기 전 생각이 나는 게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싹 숨겨 두었습니다.
막상 버리려니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그건 그것대로 어려웠습니다. 돈이 될 만한 건 진작 다 팔았으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할 만한 흔적이 고작 이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마저 버리면 내 과거를 억지로 부정해 버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죄를 지어 망한 것도 아니고, 슬프지만 그것대로 추억인데. 그렇다고 꺼내 두기는 싫어서 구석에 넣어 둔 채 고민만 하다 1년이 지났습니다.
물건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짐을 정리하며 계속 고민하다가 나름의 결론을 냈습니다.
만약 망하지 않고 회사가 잘되고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했을까요? 안 했을 겁니다. 이 물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그 물건입니다. 내 상황이 바뀌니까 그걸 보는 시선과 가치가 바뀐 것입니다. 물건이 가진 브랜드는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것입니다.
변했다는 게 문제일까요?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원래 변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쩌다 보니 망했고, 어쩌다 보니 이혼했고, 어쩌다 보니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입사할 때와 퇴사할 때의 내가 다른 것처럼,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선택을 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변해 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이런 물건으로 내 가치를 대신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다른 브랜드를 빌려 와 잠깐 있어 보이게 꾸밀 수는 있겠지만, 물건은 그대로인데 나는 계속 변하니 둘 사이에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변해 가는 과정은 언제나 나를 대신해 줍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변화를 겪든 항상 나를 대신해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내가 변해 가는 과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무리 변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내 가치를 드러내는 자산이 됩니다. 오히려 변화를 겪는 것 자체가 콘텐츠 거리가 됩니다.
좋은 시계를 차고 비싼 신발을 신는다고 내 가치가 저절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느끼고 반성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콘텐츠를 남겨 두면, 1년, 2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내 가치를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남습니다.
- 잠깐은 있어 보이게 꾸밀 수 있다
- 내 상황이 바뀌면 허세나 미련이 된다
- 물건과 나 사이에 시차가 생긴다
- 무엇을 느끼고 반성했는지 남긴다
- 변화 자체가 콘텐츠 거리가 된다
-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쌓인다
결국 물건으로 나를 드러내고 가치를 높이려 하기보다, 그 물건을 대하는 내 태도와 관점, 그리고 내가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내 가치를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콘텐츠 소재로 쓰고 나니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봐야 술이고, 그래 봐야 신발입니다. 처음에는 계속 숨겨 두었다가 빚을 다 갚으면 그때 다시 저를 포장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련을 갖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발은 버리러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과정을 위한 콘텐츠 소재로 쓰고 나니 미련이 싹 사라지고 오히려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신발을 나중에 발견한 사람은 진짜라고 상상이나 할까요? 당연히 가짜인 줄 알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브랜드라는 게 참 묘합니다. 버리고 나니 뭔가 해방된 느낌입니다.
술은 원래 기능에 충실하게 쓰기로 했습니다
술은 어떻게 할까요. 신발은 먹을 수 없지만 술은 마실 수 있으니, 굳이 의미를 부여해 쥐고 있기보다 기능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집들이를 하거나 손님상을 차릴 때 후식으로 내면 좋겠습니다.
티라미수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잖아요. 거기에 이 술을 조금 섞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진작 이렇게 쓸걸 그랬습니다.
버리기 어려운 물건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세요
지금 처지와 맞지 않는 물건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분이 있다면, 그 물건을 숨기거나 억지로 부정하기보다 그 물건을 대하는 지금의 내 생각을 한번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물건은 그대로지만, 그걸 바라보며 변해 온 내 이야기는 나만의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 글의 바탕이 된 영상이 이 집에서 찍는 마지막 영상이었습니다. 이사 때문에 한 주 쉬어 가지만, 이것도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 이 글은 유튜브 〈김단고의 생존일지〉 31화를 글로 옮긴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영상 보기
➡️ 새로운 공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망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건 희망보다 내가 가진 운을 나누는 능력입니다

